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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바보들의 행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4일 차(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

by 여행하는 상자 2026. 2. 26.
오늘의 여행

바이칼 호수를 결국
여기부터 진짜 시베리아
니글거리는 속, 몽환적인 타이가 지대
예브게니의 등장과 폰 네 개의 비밀
오늘도 어김없는 바보들의 행진
보다와 보드카의 충격적 차이
일란스카야 역 노점에서 만난 충격적 문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시베리아 횡단열차 오늘의 이동 경로
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4일 차

밤사이 바이칼을 지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애초 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이칼 호수를 야간에 지나기에

볼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간 밤, 검은 차창에 이마를 대고 

얼굴 좌우에 손바닥을 붙인 채

 

혹 순간이나마 볼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뚫어지게

밖을 내다보며 아쉬워했다.

 

끝내 바이칼을 지나치자

속이 쓰리게 아쉽다.

 

하필 달도 기울어 음력 26일,

그믐달도 이제야 뜰 시간이다.

 

칠흑 같은 밤이 원망스럽다.

보이지 않는 바이칼
결국 보인 건 도시의 인공 불빛의 아쉬움

 

부랴티야에서

이르쿠츠크로 넘어왔다는 것은

 

극동 관구를 모두 지나

시베리아 관구로

넘어왔음을 의미한다.

 

이제 사전적으로 진짜 시베리아다.

 

그런데

시베리아를 지나는 이 열차,

난방 하나는 최고다.

 

반면 날은 풀려서

외부 온도는 한국과 비슷하다.

 

객차가 너무 더웠는지

속이 좀 메슥거린다.

흔들리는 안가르스크1흔들리는 안가르스크2
안가르스크, 카메라도 속이 울렁거렸나 보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대신 아까 미리 우려 둔

홍차를 조금씩 마셔 본다.

 

속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동안

창 밖도 밝아지기 시작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반복되는 설원과 숲.

 

무한히 펼쳐지는 냉대림,

몽환적인 타이가 지대를 지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이가 숲 지대1시베리아 횡단열차 타이가 숲 지대2
무한히 공허한 시베리아

 

안가르스크를 떠난 지

세 시간쯤 지나자

지마에 도착하고,

만원이던 기차에 여유가 생긴다.

 

사람이 줄어드니 훨씬 덜 덥다.

속도 한층 편안해진다.

 

괜히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다른 칸도 구경하고

 

옆 칸 할머니들을 뵈면

가볍게 인사와 미소를 건넨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군인시베리아 횡단열차 할머니
조금 널널해진 열차 산책(?)하기

 

우리처럼 극동에서 시작해

아직까지 타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좀 있다.

 

아마도 전역하는 걸로 보이는

군인 녀석들도 매일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지마 역1시베리아 횡단열차 지마 역2시베리아 횡단열차 지마 역3
지마 역

 

앞자리 2층에도 새로운 친구가 탔다.

스무 살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름은 예브게니(Евгeний).

영어로 하면 유진(Eugene)이라고

설명해 준다.

 

착한 녀석 같다.

 

휴대전화를 네 개나 가지고 있는데

이유가 궁금해 질문했더니

차분히 설명해 준다.

 

물론 이해는 하나도 못 했다.

예브게니와 브루스 윌리스 아저씨
예브게니와 브루스 윌리스 아저씨

 

주변 사람들이 몇 번 바뀌니

제법 우리 스스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의 원천은 우리의 떡진 머리.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라는,

일종의 짬을 보여준다.

 

지마역을 출발한 기차가

갑자기 멈췄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지만

이런 돌발 상황은 덜컥 겁난다.

갑자기 멈춘 열차
무섭게 역 아닌 데서 멈추지 말라고..

 

다행히 30분 정도 지나자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브루스 윌리스 아저씨는

보드카와 기절 잠만을

반복하는 것이 지루했는지

 

우리에게도 보드카를

한 잔씩 권한다.

브루스 윌리스 아저씨가 권한 보드카
'하얀 자작나무' 보드카, 볠라야 볘료즈카(Белая Березка)

 

며칠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편견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정말 못한다는 것.

 

아니, 이 정도면

그냥 안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저씨와 예브게니

그리고 우리 둘까지 넷이 앉아서

간단한 대화를 하나 하려면

 

바보들의 행진이 따로 없다.

 

첫날, 나의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친구가 준비해 온

러시아어 회화 책도 사라졌다.

 

그 책에 주요 러시아어 단어와

우리말을 매칭한 장이 있어서

 

손가락으로 짚으며 대화하면 편했는데

고작 하루 쓰고 사라졌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간다는 내용,

 

머물지 않고 당일 한국으로

출국한다는 대화를 하는 데

20분이 걸렸다.

 

선사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툴룬 역시베리아 횡단열차 니즈녜우딘스크 역
수다 떨며 지나친 툴룬 역과 니즈녜우딘스크 역

 

타이셰트 역에 도착해서

매점을 가려는데

아저씨가 500 루블을 주면서

물(Вода)을 부탁했다.

 

드디어 매점에서

'얼마예요?'라는 뜻의

스꼴까(Сколько)를 사용하며

신나게 다녀왔는데.

 

아저씨가 부탁한 건

물이 아니라 술, 보드카(Водка)였다.

 

'보다'와 '보드카'..의 차이..

к 하나가 매복했다.

 

심지어 보드카라는 말 자체가

물을 귀엽게 부르는 것으로,

Вода에 -ка를 붙인 것이라 한다.

 

물이 술이고 술이 물이네..

역시 불곰국.

 

아저씨는 아쉬워서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다.

무르기 없음.

 

한참을 더 달려

일란스카야 역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주.

 

러시아의 '국토 정중앙'이며,

그 유명한 1908년 퉁구스카 대폭발이

여기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일란스카야 역에 노점이 섰다는 거다.

22분간 정차하는 사이

얼른 사 와야겠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크라스노야르스크 일란스카야 역 기관차시베리아 횡단열차 크라스노야르스크 일란스카야 역 노점 노점상 할머니
전시된 증기기관차와 노점 바부슈카(할머니)들

 

역에는 첫날 루지노 역에서

본 것과 유사한 증기 기관차가 있다.

 

실제 두 기관차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으로 물자를 나르던

전설적 기관차이다.

 

일란스카야는 물자를

서부전선으로만 나르지 않았다.

 

노점을 통해 우리에게도

역사적 물자를 전달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크라스노야르스크 일란스카야 역 트루보치카 과자 주전부리
무슨 일이야. 왜 맛있어 이거.

 

와! 이거 뭐야 이거!

 

이러려고 시베리아 온 건가 보다.

트루보치카(Трубочка)라는 걸 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백 개쯤 살 걸 그랬다.

 

단어 자체는 빨대라는 뜻인데,

얇게 돌돌 말린 과자 속에

갈색으로 졸인 연유를 넣었다.

 

너무 맛있다.

진짜 맛있다.

 

행복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누워 졸다가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의 주도인

동명의 도시에 도착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뜻은

'붉은 언덕의 도시'

 

그러나 아쉽게도 창 밖은 캄캄하다.

 

모든 걸 다 볼 수 없고

모든 걸 다 경험할 수 없으니

 

적당히 포기하는 법도 배워 간다.

 

그렇게 여행이 반쯤 지난다.

 

아! 그리고 생수통에 물을 받아

드디어 머리를 감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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